“파리 대왕”
소정욱
1950년대 냉전 시대, 세계는 두 개의 힘으로 양분되어 치열한 군비 경쟁을 통해 인류가 스스로 자멸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회의로 팽배해 있었다. 당시 사회는,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라는 식의 흑백논리 속에서 비생산적인 의미없는 경쟁을 했으며 지식인들은 인류의 어리석음과 악한 본성에 대해 절망하며 이를 막으려는 시도를 했다. 윌리엄 골딩은 그의 걸작 <파리 대왕>을 통해 당시 시대적 상황을 무인도에 떨어진 소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냈는데, 발전된 문명 생활에 지나치게 도취되어있던 인류가 그들의 욕망과 본성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지배되는 지를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게 묘사한 그는 이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이전까지 인간은 그들 스스로를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눈부신 발전을 일궈낸 독보적인 존재이며 세상의 어떤 생물보다도 우월한 존재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눈부신 발전만이 있을 줄 알았던 인류는 5,0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다. 이 전쟁을 몸소 겪은 골딩은 인간은 본래 악한 본성을 가져서 선함이 아닌 악마성이 인간의 원래 모습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책에서 보듯, 랠프와 잭, 그리고 다른 소년들은 무인도에서 문명생활을 유지하려고 이성적인 힘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노력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후에 낙하산병의 시체로 밝혀짐)와 서로에 대한 불신, 욕망 등이 얽히고 얽히면서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살육의 야만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은 인간을 자연 앞에서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잭이 랠프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어떤 이유로 야만성의 대표적 상징이 됐는지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첫째, 골딩은 멧돼지 사냥으로 소년들이 느끼지 못했던 ‘야만의 쾌락’을 느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멧돼지 사냥이 과연 무인도 생활을 제외한 평생 동안 문명생활을 누려 왔던 소년들의 모습을 단번에 야만인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 소년들은 집회를 열고, 오두막을 짓고, 공동의 규칙을 정하는 등 되려 문명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랠프의 주도로 언제나 문명사회로의 안전한 귀환을 꿈꿨다. 그들이 과연 문명생활 속에서의 소소한 추억과 그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의 존재를 쉽게 잊을 수 있었을까?
둘째, 골딩은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한 공포(후에 낙하산병의 시체로 밝혀짐)가 그들을 야만으로 이끌어 본성을 드러내게 했다고 주장하지만, 이야기 속 랠프와 잭 등 여럿 ‘성숙한’ 소년들은 그런 모습을 보이기에는 너무도 ‘성숙한 상태’였다. 아이들은 그들이 봐왔던 어른들의 사회를 모방해서 규칙을 만들고 집회를 열었으며, 발언권을 골고루 나눠 갖도록 상징적인 물건(소라)을 사용했다. 또한,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지적능력을 가졌던 돼지는 그런 공포가 터무니없는 것이며, 작은 섬에서는 큰 발을 가진 동물이 살지 않는다는 논리적인 의견으로 어린 소년들의 두려움을 잠재우곤 했다. 인간이 과연 악마성을 본래적으로 가졌다면, 이러한 협동심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며, 리더십과 논리성 또한 어디에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1950년대 냉전 상황에서 인류는 그들 스스로를 비관적으로 여겼으며 세계대전과는 비교가 안 될 파멸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끝날 것만 같았던 인류의 역사는 생각과는 다르게 여전히 영광을 누리며 존속하고 있다. 인류는 골딩이 생각하듯 그렇게 어리석고 나약하고 악한 존재가 아님이 증명된 셈이다. 골딩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층의 비판적인 시각이 상황을 악화일로로 치닫는 것을 막은 것은 치하할 일이지만, 인간의 모습을 악마성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발전적인 모습을 볼 때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